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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인권·민생경찰의뿌리

  • 대한민국 경찰은 '제복입은 시민'으로서, 함께하는 민주경찰·따뜻한 인권경찰·믿음직한 민생경찰로 국민 속에 자리매김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 대한민국 경찰의 뿌리인 임시정부 경찰의 초대 경무국장 백범 김 구 선생과, 그 뒤를 이어 나라와 국민을 위해 헌신했던 경찰들의 발자취를 발굴·계승하여 민주·인권 ·민생경찰의 정신으로 삼겠습니다.
김용원(金庸源) 1892~1934
경찰이력 경무국장
인물소개 군자금 모금 중 두 차례 옥고를 치른 열혈 독립투사
서훈 건국훈장 애국장
김용원(金庸源) 1892~1934

  충청남도 대덕(大德) 출신,

고향에서 1919년 3·1독립운동 때 참여하였다가 사촌인 김태원(金泰源)과 상해(上海)로 망명하여 김구(金九) 아래에서 경무국원(警務局員)으로 활약하였다.

1919년 9월부터 다음해(1920) 6월까지 황포군관학교에 들어가 군사학을 수료한 그는 1920년 7월 임시정부의 지시에 따라 대동단(大同團)에 가입하였으며,

북경(北京)에서 박용만(朴容萬) 나창헌(羅昌憲) 등과 향후 행동계획을 상의하고 비밀히 국내에 들어와 이강(李堈)공의 상해 탈출 공작에 가담하였다.

그러나 이강공이 만주 안동(安東)에서 체포됨에 따라 다시 상해로 도피하였다.

 
  상해에서는 임시정부 의정원 의원에 선출되어 활약하였으며,

1921년 5월에는 김구(金九)의 후임으로 내무부 경무국장에 임명되어 일제로부터 상해 교민과 독립운동가의 안전을 지켰다.

1922년 3월에 임시정부 의정원 의원을 사임하고 1923년에 다시 국내에 들어와 군자금 모집 활동을 벌였다.

그러나 불행히도 일경에게 탐지되어 1924년 9월 서울 동대문경찰서에 체포되어 징역 2년형을 받고 옥고를 치르던 중 옥중에서 신병이 발생하여 형집행 정지처분으로 출옥하였다.
 1925년 6월 출옥 후에 전라남도와 경상남도 일대에서 다시 동지규합 및 군자금 모집 등 독립투쟁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미행하던 일본인 형사에게 발각되어 1927년 1월 또 다시 체포되었으며 1928년 11월에 서울 서대문형무소(西大門刑務所)에서 옥고를 치르다가

1934년 2월에 고문과 옥고의 여독으로 병보석을 받고 출옥하였으나 옥중에서 얻은 지병으로 인하여 동년 6월 조국의 광복도 보지 못하고 한 많은 생을 마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