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인권·민생경찰의뿌리
- 대한민국 경찰은 '제복입은 시민'으로서, 함께하는 민주경찰·따뜻한 인권경찰·믿음직한 민생경찰로 국민 속에 자리매김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 대한민국 경찰의 뿌리인 임시정부 경찰의 초대 경무국장 백범 김 구 선생과, 그 뒤를 이어 나라와 국민을 위해 헌신했던 경찰들의 발자취를 발굴·계승하여 민주·인권 ·민생경찰의 정신으로 삼겠습니다.
제주4 · 3의 경찰의인들, 주민들의 목숨을 지켜내다.
"부당함으로 불이행!" 양민을 구해낸 5명의 경찰 의인들
문형순 성산포서장은 계엄군의 예비검속자 처형 지시에 '부당함으로 불이행'한다며 거부했으며, 외도지서 방상규 경사는 '총이 고장났다'며 총을 쏘지 않았다. 조천지서 김순철 순경은 기관총 앞을 막아 섰으며, 남원지서 장선순 경사는 '과거는 묻지 않겠다'고 하였다. 표선지서 강계봉 순경은 주민들을 인간적으로 대우해 주어 생존자들이 그 은혜를 평생 잊지 못했다.
1980년 5월, 광주시민과 함께했던 민주경찰을 기억하라.
신군부의 발포명령을 거부하고 시민 안전 확보
안병하 전남경찰국장은 계엄군의 발포명령에 대해 "시민에게 총을 겨눌 수 없다"며 거부했고, 이준규 목포서장은 경찰총기를 섬으로 이동시키는 등 시위대와의 충돌을 최소화하도록 조치하여 목포에서는 아무런 사상자가 나오지 않았다.
전남경찰, 징계 68명 · 강제사표 123명 등 문책당해
이후 경찰이 치른 대가는 가혹했다. 안병하 국장은 보안사에 끌려가 고문 당한 후 강제사직 됐으며, 이준규 서장도 직무 유기로 구속 후 파면되었다. 또한 총 68명의 경찰관이 정직 · 감봉 등을 당했고, 123명의 경찰관이 강제로 사표를 내야 했다
한 경찰관의 정의로운 내부고발, 6월 민주항쟁의 결정적 계기가 되다.
권위주의 체제를 무너뜨리고 대통령 직선제 등 우리나라 민주화에 큰 진전을 가지고 온 6월 민주항쟁! 이 과정에서 한 경찰관의 정의로운 내부 고발이 결정적 역할을 하였다. 1987년 1월, 경찰당국은 박종철 군이 사망하자 "탁 치니 억하고 죽었다."며 두 명의 조사관만을 구속하고 축소하려 하였으나, 4개월 후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이 고문 경관이 더 있다는 사실을 폭로하자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되었다. 이에 당국은 3명을 추가 구속하며 무마하려 했지만 치안 본부소속이던 모 경찰관은 "처음부터 밝혔어야 했다. 더이상 감춰선 안 된다."며 경찰 고위직이 처음부터 축소 · 조작에 개입했음을 동아일보 기자에게 제보하였다. 분노한 시민들은 진상규명을 요구하며, 민주화항쟁을 본격화했고 결국 직선제 개헌 등의 6.29선언이 발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