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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인권·민생경찰의뿌리

  • 대한민국 경찰은 '제복입은 시민'으로서, 함께하는 민주경찰·따뜻한 인권경찰·믿음직한 민생경찰로 국민 속에 자리매김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 대한민국 경찰의 뿌리인 임시정부 경찰의 초대 경무국장 백범 김 구 선생과, 그 뒤를 이어 나라와 국민을 위해 헌신했던 경찰들의 발자취를 발굴·계승하여 민주·인권 ·민생경찰의 정신으로 삼겠습니다.
장덕진(張德震) 1898~1924
경찰이력 의경대
인물소개 독립운동자금 마련 중 순국한 임시정부 행동대원
서훈 건국훈장 독립장
장덕진(張德震) 1898~1924


황해도 재령(載寧) 출신,

설산 장덕수(雪山 張德秀)와 동아일보 간도특파원으로 실종 순국한 추송 장덕준(秋松 張德俊)과 형제이다.
1919년 3·1독립운동이 일어나자 만주로 망명하여 오동진(吳東振)·박태열(朴泰烈) 등과 같이 광제청년단(廣濟靑年團)을 조직하였으며,

1920년 2월 만주의 광복군총영(光復軍總營)이 임시정부의 승인을 받게 되자 총영장 오동진의 막료로 임명되어 무장활동을 계속하였다. 


  1920년 8월 3일 그는 박태열(朴泰烈)·문일민(文一民)·우덕선(禹德善)·김예진(金禮鎭)·안경신(安敬信) 등과 함께 한국광복군총영 제2대에 소속되어

평안남도경찰부 청사와 평양시청, 평양경찰서 등에 폭탄을 던졌으나, 평남경찰부만 일부 폭파하고 일경 2명을 폭사시켰으며, 나머지 폭탄은 불발에 그쳤다.

그들은 거사 후 무사히 본대에 돌아왔으나 여성대원인 안경신(安敬信)만이 유일하게 체포되어 징역 10년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그는 궐석재판에서 무기징역형을 받았다. 


  그 후 상해로 망명하여 임시정부에 협력하였으며,
1922년 8월에 국민대표회의주비회(籌備會)의 조속한 개최를 촉구하는 '선언'을 발표하여 분열되는 독립운동단체 대표들의 각성을 촉구하기도 하였다.

1923년 12월 26일에는 최천호(崔天浩)와 함께 상해교민단 의경대원(義警隊員)에 임명되어 교포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는 임무를 수행하였으며,

의경대 고문인 김구(金九)의 지시를 받고 활동하였다.


  1924년 3월 21일에는 상해의 청년동맹회(靑年同盟會) 발기인 중 한 사람으로 참여하여 그 집행위원에 선임되기도 하였다.
 그러던 중 일본 밀정 김명현의 간계에 속아 1924년 8월 중국인에게 저격당하여 광자병원에서 사망하였으며,

상해 갑북황가남묘(閘北黃家楠廟)의 기독교 묘지에 안장되었다. 당시 동료들은 그의 죽음을 애도하고 독립정신을 전수하기 위해 '장덕진전'을 간행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