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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인권·민생경찰의뿌리

  • 대한민국 경찰은 '제복입은 시민'으로서, 함께하는 민주경찰·따뜻한 인권경찰·믿음직한 민생경찰로 국민 속에 자리매김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 대한민국 경찰의 뿌리인 임시정부 경찰의 초대 경무국장 백범 김 구 선생과, 그 뒤를 이어 나라와 국민을 위해 헌신했던 경찰들의 발자취를 발굴·계승하여 민주·인권 ·민생경찰의 정신으로 삼겠습니다.
김철(金澈)
경찰이력 의경대
인물소개 항주 시기 임시정부를 이끌다
서훈 건국훈장 독립장
김철(金澈)

  전라남도 함평(咸平) 출신, 1917년 상해로 건너가 법률학을 전공하였으며, 1919년 3·1독립운동이 일어나자 신한청년당을 중심으로 한 30여 명과 같이

상해 불란서조계 보창로(寶昌路) 329호 건물에 대한독립임시사무소를 설치하였다.


  1919년 제1회 임시의정원회의에서 전라도 의원에 당선되었고, 동월 제2회 회의에서는 임정 재무위원 겸 법무위원이 되었다. 같은 해 8월에는 임시정부 교통차장에 임명되어 총장대리까지 겸직하였다.
 국내 조사원이기도 했던 그는 동시에 신한청년당 부주무(副主務)로서 기관지 「신한청년」을 발간, 독립정신을 고취하였으며 대한적십자회의 상의원(常議員)도 역임하였다.


1920. 1월에 그는 상해에서 김구(金九)·손정도·김순애 등과 같이 항일단체인 의용단(義勇團)을 발기, 독립운동에 박차를 가하였다.
 1920. 3월에 선전위원회가 조직되자 그는 동 위원장 안창호(安昌浩)를 도와 선전업무에 종사하며 군자금을 모금하는 등 임시정부 지원 업무를 계속 하였다.
 1922. 7월에는 시사책진회(時事策進會) 회원으로 임시의정원과 국민대표회의간의 갈등을 해소하는데 진력하였으며, 1924년 임시정부 국무원회계검사원 검사장(國務院會計檢査院檢査長),

1925년 신한청년당 이사, 1926. 12월에는 임시정부 국무원에 임명되어 활동하였다.


  1930년에는 군무장(軍務長)으로, 1931. 10월에는 안창호와 함께 교민단(僑民團) 심판이(일본 정보보고서에 의하면 1933년에는 의경대 명예대원이었다.) 되어 상해교민의 안녕과 질서 유지에 전념하였다. 1931. 11월에는 중국인과의 공동항일전선을 형성하여 중국항일대동맹(中國抗日大同盟)을 조직하고 활약하였다.
 1932. 1월 상해 대한교민단(大韓僑民團)의 정치위원으로 선출되고, 같은 해 11월 24일에는 국무위원에 임명되었다.
 1932년 말 일시 일영사관 경찰에 체포되었으나 불란서 당국의 항의로 곧 석방되기도 하였다.
 1933년 3월에는 임정 국무위원직을 사임하였으나 1934년에 다시 국무위원 겸 재무장의 일을 맡았다.
 안타깝게도 그는 1934. 6월 항주(杭州) 소재 광자병원(廣慈病院)에서 신병으로 투병하다 임정 요인들의 애도 속에 서거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