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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인권·민생경찰의뿌리

  • 대한민국 경찰은 '제복입은 시민'으로서, 함께하는 민주경찰·따뜻한 인권경찰·믿음직한 민생경찰로 국민 속에 자리매김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 대한민국 경찰의 뿌리인 임시정부 경찰의 초대 경무국장 백범 김 구 선생과, 그 뒤를 이어 나라와 국민을 위해 헌신했던 경찰들의 발자취를 발굴·계승하여 민주·인권 ·민생경찰의 정신으로 삼겠습니다.
[웹툰] 6·25전쟁과 구국경찰
등록일 2019-06-17 00:00:00
부서명 본청 대변인
조회수 1129

1950년 6월 25일 03시 정동진 해안 초소 해안경계 근무를 하던 강릉경찰서 전대욱 순경은 상륙하는 적군의 기습공격을 받고 6·25전쟁 최초로 전사자로 기록된다. 춘천지역 국군이 집결할 수 있게끔 우리가 버텨야 합니다. 내평지서장 노종해 경위 같은 날 05:00 춘천경찰서 내평지서 노종해 지서장과 경찰관들은 춘천으로 가는 길목을 지키기 위해 결사항전을 다짐하고 있었다. 지독한놈들! 안되겠다! 박격포로 갈겨버려! 쾅 퍼엉 이들은 불과 15명의 인력으로 북한군 1만명의 진격을 1시간 이상 저지하였지만, 거의 대부분이 전사하고 말았다. 그들의 희생으로 북한군 진격이 지연되어 국군 6사단은 방어선을 구축할 수 있었고, 이는 6·25전쟁 최초의 승전인 춘천지구 전투 승리의 초석이 되었다. 개성철도경찰대 대장 감봉룡 경감 오라-! 우리 경찰은 물러서지 않는다! 대한민국 만세-!! 같은 시간, 수도 방어의 첫 번째 요충지인 개성역에는 국군이 후퇴한 상황에서도 50명의 개성철도경찰대원들이 집결하여 끝까지 싸울 것을 결의한다. ※철도경찰본대 ('46. 1. 25.~'53. 10. 15.) : 내무부 치안국 직속, 산하에 개성을 비롯하여 12개 지방철도경찰 조직을 두었다. 그들은 감봉룡 대장 등 43명이 전사하면서 북한군 2개사단에 맞서 싸웠고, 무려 4시간 동안이나 개성지구 함락을 지연시켰다. 한반도 전체를 피로 물들인 동족상잔의 비극 6·25전쟁의 서막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6·25전쟁의 구국경찰 제작 : 경찰청 작화 : 이인재 1950. 6. 28. 북한군은 사흘만에 수도 서울을 점령하였고, 서울 이남의 각 지방 경찰들은 본격적인 지연전을 전개한다. 석 경위, 나를 대신해서 부대를 맡아주게... 안 됩니다. 대장님!! 석상익 경위 김해수 경위 1950. 7. 8. 북한의 공세에도 강원도 경찰당국은 영월의 화력발전소를 사수하기 위해 김해수 대장과 47명의 결사대를 파견한다. 호국경찰전적비 처절한 전투 속에서 김해수 대장에 이어 석상익 경위마저 전사하는 등 경찰관 24명이 전사하고, 7명이 부상을 입는다. 그들의 용맹함은 지금도 매년 호국경찰전적비 앞에서 추모되고 있다. 주민을 버리고 철수 할 수 없다. 곡성을 사수하자!! 한편 1950. 7월 낙동강 전선으로 후퇴하라는 명령에도 불구하고 곡성경찰서장 한정일 경감은 경찰관과 의용대원으로 구성된 520명의 곡성전투경찰대를 편성하고 태안사에 입산하여 전투에 임한다. 콰광 606 그들은 7월 29일 북한군이 섬진강 상류 압록교를 건널 것이라는 첩보를 입수하고 인근에 매복, 치열한 전투 끝에 52명을 사살하고 사이트카 5대를 빼앗는 등 전과를 올린다. 이후에도 수적인 열세에도 불구하고 효과적인 유격전으로 적의 정규기갑 부대를 패퇴시켰다. 38도선 1 1950.6.25 북한군 남침 서울 2 1950.6.28 북한군 서울 점령 대전 3 1950.7월말 북한군 낙동강 진출 대구 부산 4 1950.8.1 국군·유엔군, 낙동강 방어선 구축 전황이 불리해지면서 국토의 90% 가까이 적에게 점령되어 더 이상 물러설 수 없는 최후의 결전이 시작되고 있었다. 7월 26일 미 8군 사령관 워커 중장은 낙동강 방어계획을 수립하고 동서80km, 남북 160km의 방어선을 구축한다. 그리고 다음날 대구에서 최초의 경찰·군 간의 연석회의가 개최되어 경찰도 각 도경 단위로 전투부대를 갖추게 되었다. 대구를 내주는 것은 나라를 내주는 것과 같다. 우리 경찰만이라도 남아 대구를 사수해야한다! 조병옥 내무장관 이후 9월 8일, 정부와 군지휘부는 모두 부산으로 이동했지만, 경찰만은 대구시민과 피난민들을 지키기 위해 최후까지 대구를 사수하기로 결정한다. 함안지구 경찰승전탑 6·25전쟁경찰승전탑 낙동강 방어선에서 치열한 전투가 계속되는 가운데, 국군들이 동부전선인 다부동으로 이동하자, 서부전선 함안지구에는 전남·북 및 경남 3개도 경찰관 6,800명들이 미군들과 함께 북한군 4개 사단에 맞서 끝내 방어선을 지켜냈다. 한편 경북 칠곡 다부동은 낙동강 방어의 성패를 좌우하는 요충지로, 8월부터 두 달간 유엔군·경찰·국군이 일체가 되어 치열한 전투 끝에 낙동강 방어선을 사수하였다. 당시 전국에서 집결한 15,000여명의 경찰관들이 낙동강 전선을 지키기 위해 투입되었고, 고지를 뺏고 뺏기는 치열한 혈투 속에 수많은 경찰관들이 장렬히 산화하였다. 낙동강 방어로 연합군은 반격을 준비할 수 있었다. 유엔군 총사령부는 1950. 9. 15. 인천상륙작전에 이어 9. 28. 서울수복에 성공한다. 후퇴하느니 차라리 이곳에서 뼈를 묻자! 국립경찰화랑부대 3중대장 문학동 경감 이 당시 조병옥 박사는 경찰부대 전력보강 및 UN군의 현지전투 지원을 위해 한국경찰의 UN군 배속을 요청하였고, 15,000여명의 한국 경찰이 UN군에 배속되었다. 이중 정예훈련을 받은 300여명은 '국립경찰 화랑부대'로 활동, 인천상륙작전 서울수복을 거쳐 북진하면서 장진호 전투에서 뛰어난 전공을 올리기도 하였다. 여자경찰 역시 단순 후방 지원 임무에 그치지 않고 선무공작 등 실제 전투에 참전하기도 하였다. 충남 여자경찰관들은 1951년 대둔산 전투대대에 편성되어 전선에 투입되었고, 1954년 서남지구전투경찰대는 여자경찰 36명으로 1개 소대를 편성하여 공비토벌 지역에 직접 투입하였다. 서남지구전투경찰 유엔군의 이어지는 승리로 남쪽에 고립된 북한군이 지리산, 태백산 등지에서 게릴라 활동을 전개하자, 경찰은 1950.12.16. 태백산 및 지리산 전투경찰사령부, 1950.1.30. 운문산지구 전투경찰사령부, 1953.5.1. 서남지구 전투경찰사령부를 설치, 공비토벌에 주력하는데, 남부군 총사령관 이현상 사살과 마지막 공비 정순덕 체포 역시 구국의 경찰들에 의해 이루어졌다. 지리산 귀신이 떴다-!! 경남 산청경찰서 산천유격대장 강삼수 경위는 10여 명의 경찰관들과 62차례의 격전을 치르며 지리산 일대 공비 토벌을 이끌어 '지리산 귀신'이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였다. 경찰충혼탑 경찰충혼탑 6·25전쟁 중 1만명의 경찰관이 전사하였고, 전 경찰의 3분의 1에 해당하는 1만7천여명이 죽거나 다쳤다. 조국의 위기에 자신의 목숨을 바쳐 희생한 구국의 경찰 영웅들! 우리 경찰이 영원히 기억하고 계승해야 할 숭고한 경찰정신이다. 6월은 호국보훈의 달입니다. 이름 없는 경찰 영웅들을 기억하고 그 뜻을 함께 이어가겠습니다. -경찰청- -참 고- 국가보훈처 이달의 전쟁영웅 전쟁기념관 이달의 호국인물 내무부치안국, 『한국경찰사』 2권, '73년 유관종, 『한국경찰전사』, '82년 윤장호, 『호국경찰전사』, '95년 이용하, 『태안사별곡』, '00년 대한민국참전경찰유공자회, 『아~ 살아있다! 대한민국 경찰의 혼』, '03년 대한민국여경재향경우회, 『한국여자경찰 60년사』, '70년 경찰청, 『구국경찰사』, '16년 변해석, 『6·25전쟁 시 개성철도경찰대의 개성역 전투연구』, '16년 경찰청 임시정부 100주년 기념사업 추진팀